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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가기싫은 여러가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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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차인연합회 작성일07-07-05 16:43 조회7,9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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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 / 이만재 지음 ]
저자 이만재씨는 카피라이터이며, 칼럼니스트이다.
서울카피라이터즈 클럽 회장을 2회역임하고, 한국 수필가협회 회원이며,
조선일보광고대상, 경향신문광고대상 심사위원, 40대 후반에 늦깍이로
 예수님을 영접, 기독교계 최고의 스테디셀러가 된 <막쪄낸 찐방>,
 <세상 속의 찐빵>의 저자이며, [카피파워]대표이다.
 <교회 경험이 없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1. 노방전도 모습 보면 만정이 딱 떨어진다
 지하철역 같은 곳에서 큰소리로 “예수구원”, “천국구원” 등을 외치는 이들을 자주 본다. 이상스런 각설이 복장에 화가 난 흉한 얼굴로 “말세!”, “종말!”을 외치는 사람도 보았다. 예수 믿으면 나도 저렇게 될까봐, 또는 남들이 저 비슷한 부류로 취급할까봐 아예 교회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겠구나 하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된다.
찐빵의 생각- 신앙의 속성이 원래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도 어떤 이는
 묵상하기를 즐기고, 또 어떤 이들은 통성 기도하기를 즐기지 않습니까?
또 스스로 거리로 뛰쳐나가 세상 만인들한테 당장 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예수님의 재림 임박을 간절히 믿는 경우도 있겠지요.
다행한 것은 이제 날이 갈수록 그런 이들의 수가 줄어드는 추세에 있다는 사실이며, 또 이제는 대부분의 목사님들도 그런 방식의 노방전도는 별반 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가지 귀뜀을 하자면 이상스런 언동으로 노방전도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일부는 정통 기독교단 소속이 아닌 사이비 교파 사람들도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그런 사소한 이유로 해서 젊은이가 교회를 멀리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젊은
 이의 냉철한 이성과 지성을 의심할 만한 일도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군요. 종교의
 모습 가운데 99.9%는 참으로 아름답고 경건하며, 0.1%의 상한 기분 때문에 99.9%나
 되는 ‘생명의 보물’을 포기하는 미욱한 젊은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참모습은 거리에 있지 않고 교회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2 시간적, 정신적 여유 없어 교회 못 가
 나처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한테는 솔직히 주중보다 주말이 더 바쁘다. 듣기로는 한 번 교회에 나가기 시작할 경우 교회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준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부담이 되거니와 다른 한편으로는 시간과 아울러 내 마음 자체에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찐빵의 생각- 그러나 사실은 시간적 여유나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바로 교회에 다닐 ‘생각’이 없고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정직한 대답이 아닐까요? 교회생활에 충실한 신자들은 어떻게 시간관리를 하는 것일까요? 젊은이의 경우와 신자들의 경우가 다른 것은 시간 배분의 우선순위가 다르다는 점을 먼저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인들은 월요일을 한 주일의 시작으로 치고 주말을 한 주일의 끝으로 칩니다만 교인들은 일요일을 한 주일의 시작으로 칩니다. 일주일의 첫째날을 주님께 바치고 나서 그 다음 월요일부터 제 생업에 착수하는 것이지요. 거기에 바로 ‘생각’의 차이가 있고 ‘필요성’의 여부가 따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제 할일을 하고 나서 남는 시간에 그냥 교양 삼아 가는 곳이 아니라 한 주일치 자신의 올바른 삶을 위해 말씀의 생명력과 보혈처럼 귀한 성령을 내 영혼 안에 충전받기 위해 가는 곳이라고 한번 ‘생각’을 바꿔보시지요. 그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면 자연히 ‘필요’의 가장 절실한 우선순위에 교회가 등장할 것입니다.
무한경쟁의 현대사회에서 ‘사람의 일생은 곧 시간의 승부다.’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모든 시간 사용을 자기중심적으로 철저히 효율화함으로써 남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이 거칠고 각박한 세상을 쉰 해 정도 치열하게 살아본 내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일생은 세상적인 시간 효율 가동량의 과소 여부로 승부가 나는 게 아니라 삶의 질, 시간의 질, 성취의 질, 또는 심성의 질에서 결국 판가름이 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쉽게 바꿔 말하자면 그 사람이 얼마만큼의 거리를 많이 달렸느냐보다 그 사람이 얼마나 제대로 된 길을 바로 걸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더라는 얘기입니다. 교회식으로 말하는 소위 영혼의 구원을 받고 안 받고는 나중 문제입니다. 단 한 번뿐인 귀한 자기 인생을 과연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옳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에만 국한해서 따져 본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도출될 정답은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필요’ 여부나 우선순위도 덩달아 달라지겠지요? 쫓기듯 살아온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면서 한 호흡 멈추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귀한 일생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기필코 성공적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 가지 삶의 목표들이 있겠습니다만 그 모든 것들 가운데서 가장 영원한 가치를 지닌 최상의 길 하나를 선택했다고 믿기 때문에 많은 훌륭한 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교회생활을 첫번째 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택해서 추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궁극적인 유익의 길을 외면하는 것처럼
 손해보는 일생은 없을 것입니다.

3. 말 많은 전도사 너무 싫어!
전도사한테 한 번 걸렸다 하면 이건 완전히 사람 XX된기 딱 알맞다. 어찌나 집요하게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지 학질을 떼는 기분이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말로 자기네 일방적인 주장만 늘어놓는데 그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할 뿐만 아니라 뜬구름 잡는 것과 같은 비합리적인 얘기들이어서 정상적인 이성으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다. 게다가 자기 혼자만 세상이치를 다 아는 듯이 독선적으로 떠벌린다. 그럼 나는 골빠진 XX이란 말인가?
찐빵의 생각- 삶의 신고를 통해서 우리는 어느 날 문득 절대의 힘과 절대의 사랑을 가진 단 한분의 존재가 그렇게 절실하게 소중하다는 필요 앞에 마주서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막연하게 그냥 기다리는 그때는 이미 너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될 줄 압니다. 전도사님들이 입에 침을 튀기면서까지 우리를 위해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에서 일 터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기실따지고 보면 아쉬운 것은 전도사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이 아닐는지요?

4 부자교회, 천국 갈 수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부자 교회들이 많은 곳도 아마 없지 않을까? 신도들보고는 부자 되기를 포기하라 하고 교회는 다투어 부자 교회 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 솔직한 현실 아닌가. 끝이 보이지 않는 탐욕을 그럴싸한 명분으로 위장하여 갈수록 뚱뚱하게 살쪄가는 비만증 교회들, 엄청나게 많은 신도들의 숫자를 앞세워 툭하면 압력단체로 군림하곤 하는 권세 높은 교회들이 내 눈에는 별로 존경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찐빵의 생각- 깐깐하고 검소한 예산 집행 과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부자 교회
 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않는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예산은 어느 특정 개인의 것이 아니고 교회의 교육사업, 선교사업, 자선사업 등으로 쓰여지는 것이어서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이 우리 사회에 다시 환원되는 성질의 것이랍니다. 다만 그것들이 말씀의 본디 뜻에 따라 소리 소문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사회인들한테는 잘 알려지지 않을 뿐입니다.
좋은 일 좀 했다 해서 떠들썩하게 제 자랑하는 교회를 본 일이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는 이른바 부자 교회보다는 그렇지 못한 극빈의교회
 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한 예로 기장 교단의 경우를 한 신학자가 조사한 것을 보면 신도 수 50명 미만인 교회가 전체 348개 교회 중 286개나 됩니다. 목회자의 월 사례비는 전체 평균액이 533,000원이랍니다. 특히 개척교회 목회자들의 5.5%가 교사, 농업, 건축, 우유 배달, 청소부 등의 부업을 하고 있고, 사모들의 10.9%가 공무원, 유치원 교사, 간호사, 미용사, 도배사, 보험 설계사 등의 취업 전선에서 일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넉넉지도 않은 성도들의 헌금에 자신의 생계까지 의존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들이겠지요. 젊은이가 지적한 소위 부자 교회로 분류되는 비율은 아마 전체의 1%가량도 못마땅하다하여 그 단순한 이유 때문에 교회를 멀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젊은이의 중대한 자가당착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절대로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5.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
찐빵의 생각- 우선 지금껏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를 얼마나 사랑해 오셨는가를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코 유복하다 할 수 없는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명문 학교의 학생으로 좋은 성적을 성취하게 해주신 축복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젊은이의 생명을 과연 누가 주셨는가. 젊은이의 영특한 두뇌와 재능과
 의지력을 누가 주셨는가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이 지구상에는 훌륭한 위인도 많고, 위대한 예술가도 많고, 뛰어난 과학자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우리 인간 모두는 원래가 보잘것없는 한 줌 흙이었습니다. 그 흙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신 분이 바로 만유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님의 깜깜한 뱃속에서 어머님의 핏줄을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태아가 당장 제 눈에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제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형국일 것입니다. 만일 어느 날 뱃 속의 그 태아가 소리를 내어 “보이지도 않는 엄마 같은 것은 내게 필요 없다. 내가 믿는 건 나 자신뿐이다.”하고 외친다면 젊은이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쥬라기 시대의 공룡보다 더 힘 센 동물은 지구상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공룡의 그 힘보다 더 덧없는 힘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의 패기, 젊음, 총명..., 그것의 한계는 과연 영원하고도 완벽한 것일 수 있을까요?

6 술 담배도 이해못하는 교회, 이해 안 돼!
술과 담배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기호와 취향의 문제여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신앙생활과 결부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술 담배를 전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물에는 이해의 양면이 공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꼭 교회에 나가야 된다면 나중에 술 담배 끊고 나서 한 번 고려해 보겠다.
찐빵의 생각- 교회가 그것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 인체를 하나님께서 선물로 허락하신 고귀한 성전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성전을 술이나 담배 따위로 오염시킬 필요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술이나 담배가 우리 몸에 이로울 것은 없지요. 그러나 우리 교회는 몸 쪽보다는 정신 쪽에 더 비중을 두고 술 담배를 경계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이로움과 해로움의 양면이 있다는 절은이의 말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해로움을 피하여 이로움만 취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
 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하겠지요?
일단 교회에 나가보세요. 술 담배 따위와 싸우기는 그렇게 대단한 문제가 아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7 종교, 미신과 뭐가 다르담?
찐빵의 생각- 미신들의 공통점은 물리적 가시성과 과학적 논리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어쩌면 종교도 그 부분만 보자면 미신과 대동소이한 면을 갖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자칫 미신과 종교를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고 보기가 쉬운데 바로 거기에 세속적인 우리 인간 지능의 한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자신조차도 한때는 그런 유물론적 관념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까짓 밑져야 본전이라는 단순한 생각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애의 지표로 한 번 삼아 보겠노라고 농담 반 진담 반의 형국으로 뜬금없이 성경책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나이를 많이 먹고 난 후의 일이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어느 순간 문득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뜻 보아 가장 비과학적이고 가장 비논리적인 것처럼 여겨 왔던 성경 말씀이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게 ‘과학적’ ‘논리적’일 수가 없더란 얘기입니다. 우리 인류의 역사, 정치사, 문화사, 정신사를 정학히 꿰뚫는 그 완벽성하며, 한 치도 오차가 없는 그 절절한
 윤리관의 정의하며, 진실된 삶의 가치관을 명쾌히 규정한 그 투명성하며, 미완성의
 과학 수준이나 그 가설적 본질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내 정신을 매료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현재 닿아 있는 그 시점으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먼발치서나마 자주 흘깃거려 보시기를 원합니다. 그분보다 더 매력적인 인물이 인류 역사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입니다.

8 타종교, 타종파에 너무 배타적이다.
타종교, 타종파를 존중할 줄 알아야 내 종교, 내 종파도 존중받는다는 것은 상식 아닌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는 말씀에서 ‘이웃’은 이웃종교도 포함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특유의 종교 이기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찐빵의 생각-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는 ‘남을 해코지하지 말고 착하게 살자.’는 데서는 부분적으로 일치합니다. 허나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매우 중요한 차이가 납니다.
첫째, 우리 모든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엄연히 적시한 성경 대목입니다. 바로 이 생명 지음 받음보다 더 감사한 일을 달리 떠올릴 수 있겠는지요?
둘째,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의 원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바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한 차원의 사랑을 달리 찾아보실 수 있는지요?
셋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 이미 3일 후의 부활을 예언하시고, 꼭 그대로 어김없이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신격의 증거를
 달리 찾아보실 수 있겠는지요?
이와 같은 엄연한 교리의 차이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설득 방법의 미숙으로 인해 그것이 세인들의 눈에 배타적, 비판적, 이기적으로 보였다면 그것은 교회의 잘못일 것입니다. 기독 사상의 근본 정신은 온유와 인내와 포용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군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채 오로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피를 흘리시고 목숨을 바치신 그 분을 주님으로 섬기는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 아닙니까?

9. 종교 없어도 불편함 못 느낀다
 왜 그렇게 종교인들은 전도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종교가 없어도 전혀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 ‘좀머씨’의 말처럼 날 좀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산 속의
 산토끼도, 노루도, 꽃과 나비도 종교가 없지만 그냥 섭리대로 잘 살지 않는가 말이다. 나는 그냥 이대로가 좋다. 편하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 못지않게 나는 자유주의자였고 낭만주의자였고 인본 개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왜 나이 쉰이 다 되어서 아차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만났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옳다고 믿었던 그런 내 방식대로의 생활 자세가 결국 하나뿐인 내
 삶의도식을 온전히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방식의 삶에는 너무나도 많은 변수가 잠복해 있었고, 나의 그런 자유방임적 인생관에는 너무나도 많은 시행착오가 끊이지 않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번민과 고뇌가 난마처럼 얽히고 꼬여 이제는 더 이상 숨이 막혀 견딜 수가 없었을 즈음에 나는 한 줄기 눈부신 구원의 서광을 찾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나는 헛것들로 가득 찬 나를 비워내고, 꽉 막힌 나를 뚫어내고, 그렇게도 무거웠던 운명의 짐, 자업자득의 짐, 그리고 끝간데 없는 욕망의 짐을 다 내려 놓았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내 방식대로가 아닌 말씀의 방식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오리무중
 이던 시야가 밝게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에 따라 손을 뻗으면 거기에 올라갈 사다리가 있었고, 말씀에 따라 발을 내딛기만 하면 그곳에 어김없이 징검다리가 놓여 있었습니다.
오감에 닿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외면하고 살았던 성경 말씀을 진정한 ‘복음’으로 그렇게 꿀맛처럼 감사히
 영접해 맞아들인 연유가 그러합니다.
종교는 바로 그 죄를 사함 받고 영혼의 구원을 얻는 데 큰 뜻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만일 “내겐 종교가 필요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치 “나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동물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영혼의 얘기입니다.

10 부모님이 반대하신다
 찐빵의 생각- 아직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 사고방식에 완고히 묶여 사시는 어른들이 참 많지요. 그것은 그분들이 종교를 ‘생명의 빛’으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단순한 관습적 타성에 젖어서 관념적으로만 여겨온 데 까닭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체된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생의 전기를 마련하자면 우선 젊은이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생명, 우리의 영혼 구원과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를 먼저 인식하고 체험하는 게 순서일 줄 압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유익된 것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녔습니다.
성경의 일차적인 매력은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하나같이 다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삶을 올바른 길에서 끝내 승리하게 하는 놀라운 비법의
 보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젊은이가 행복하고 성공적인 삶, 승리하는 삶을
 개척한다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부모님께도 효도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새로운 삶을 함께하기 위해 젊은이는 부모님을 향하여 자신있게
 설득 권면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말이있습니다. 자식이 올바른 삶의 길을 찾았다는데 그것을 싫어하실 부모님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그 행복한 삶의 요람으로 부모님을 모셔들이는 일 또한 자식된 도리가 될 것입니다.
부모님이 교회생활을 반대하신다고 해서 쉽게 포기해 버리는 그런 나약한 젊은이가 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 힘을 내서 지금 당장 ‘생며의 빛’을 움켜잡으시기 바랍니다.

11. 조용한 교회 어디 없나?
성스럽고 신성한 교회, 그래서 아무때나 마음의 위안을 받고 싶을 때 누구나 부담없이 들어가서 조용히 자신을 의지하거나 회개하거나 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회는 목사나 교인들의 극성 때문에 섣불리 접근하기가 겁난다.
어디에 사는 누구냐는 둥,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느냐는 둥, 전화번호와 주소가 어떻게 되느냐는 둥, 하나님과 예수님이 어떻고 어떻다는 둥, 영혼구원이 어떻고 어떻다는 둥......., 한 번 잘못 걸리기만 하면 혼쭐이 날 만큼 고역을 치러야 한다.
만일 그에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금방 냉담해져 버린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교회는 언제나 누구든지 부담없이 마음놓고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묵상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나 성당에 들어가려면 경비원이 제지하고, 사찰에 들어가려면 입장권을 사야 하는 현실은 세상의 편의를 위해 원칙을 무시한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교회의 문을 무인지경으로 항시 열어둘 수 없게 된 것은 교회의 탓이 아니라 아마 세상의 탓일 것입니다. 예배 집회를 위해 항시 깨꿋이 정돈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할 성전이 무시로 드나드는 신분 불명의 불청객(?)들에게 개방된다면 차마 그 뒤치다꺼리를 다 감당하기가 어렵겠지요.
문제는 교회의 문이 잠겨 있나 열려 있나가 아니라 교회를 보는 이의 마음 자세,
그리고 교회당에 들어가 기도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심정 여하에 달려 있지 않나 여겨집니다. 굴절된 눈으로 교회를 바라보면 굴절된 교회만 보일 것입니다.
교회 탓하지 말고 젊은이 자신의 심성을 먼저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12. 교인 아니면 다 사탄인가?
교회의 일방적인 이기주의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네 종교를 믿으면 천사요, 안 믿으면 악마라는 식의 억지 논리를 누가 과연 믿을 것인가. 교회식 논리에 따르자면 마이클 잭슨도 사탄이고 스필버그도 사탄이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옷을 일이다. 그러니 성인이 된 내가 어떻게 그런 억지논리를 거부감 없이 수용할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대다수 현대인의 공감을 사려면 교회의 논리도 이제 그 폭을 한참 넓혀야 할 것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는 기독교가 기독교 아닌 모든 것들을 사탄시한다고 보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가 잘못 와전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독정신의 근본은 타인을 사탄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웃을 긍휼히 여겨 사랑하고 그 영혼을 원죄로부터 구원하는 데 있음을 이해하여 주기 바랍니다.
마이클 잭슨이나 스필버그도 사탄이 아니라 전도와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바림직한 것은 교회를 밖에서 겉모양만 볼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안에 들어와서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의 참모습과 만나는 일이 아닐까요?

13. 기독교는 외래문화라는 생각이 든다
 교회 앞을 지날 때보다는 절 앞을 지날 때 마음이 훨씬 편하다. 아무튼 종교라는 게
 대충 다 그게 그거라면 왜 우리 종교를 마다하고 서양종교를 믿는지 모르겠다. 전통을 숭상하는 민족 자존심은 어디로 갔나?
찐빵의 생각- 요즘 젊은이들은 종교를 대충 사념이나 관념의 치장쯤으로 허술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종교는 ‘그게 다 그거’가 아닙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기독교를 외래종교, 불교는 전통종교로 알고 있는 듯한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외래로 치자면 기독교나 유고나 불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가운데서도
 불교는 인도에서 발상하여 중국을 거쳐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고,
유교는 중국에서 생겨나 불교와 비숫한 무렵에 고구려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순수한 우리민족 종교라면 불교나 유교가 아니라 상고시대의 주술적 기복신앙이나 조선 말기 실학사상, 동학사상을 근간으로 한 천도교나 증산교 등을 꼽아야 옳을 줄 압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과연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 중의 진리로 들어가는 문이냐 하는 물음일 것입니다. 이 물음은 ‘대충’ 기분으로 가볍게 이루어지거나 답변되어서는 안 될 물음입니다. 어떤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을 갖고 이루어져서도 안 될 물음입니다. 왜냐면 이 물음이야말로 우리 생의 의미와 보람과 목적을 구획짓는 최후의 물음이고 운명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타종교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종교는 모두가 저 나름대로 우리의 혼탁한 사회현실을 정화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하나씩 맡고 있다고 보는 까닭이지요. 그런 가운데서 기독교는 내게 특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셔서 우리 대신 스스로 ‘사랑과 구원의 피’를
 흘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앙의 대상 가운데 사랑과 희생의 화신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랍니다.

14 광신도들의 광적 행태 무서워!
하나님께서 과연 남의 눈에 너무 튀는 그런 광적인 삶을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일까? 교회라는 델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가 자칫 나도 그렇게 물들까봐 솔직히 겁나는 부분이 많아 엄두를 못 내고 있다.
찐빵의 생각- 우리가 놀이터의 청룡열차를 탄다고 가정합시다. 어떤 이는 이를 악물고 그 경이적인 속도감을 조용히 혼자서 참아냅니다. 아니, 속도감을 즐기는 반응 양상이 그렇게 조용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는 요란하게 비명을 지르면서 속도감에 대한 쾌감을 드러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모습, 기도드리는 모습도 그렇게 조금씩 다르답니다. 어떤 이는 혼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기도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감에 감동한 나머지 격정적인 감정표현을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제3자가 한마디로 어느 것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성질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이란 남들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고 모방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신앙 자세를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다른 이들의 모습에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지 않을가 싶습니다. 신앙에도 질이 있다면 그 질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 말씀이 과연 진리 중의 진리로구나하는 깨우침에 도달하는 일, 그리고 그 깨우침에 기필코 나도 한 번 도달해 보겠다는 각오 아래 말씀공부에 임해보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발견해 나가는 과정에서 필경 젊은이의 닫힌 마음문도 조금씩 열려질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신앙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삶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15. 허황된 성경얘기 어떻게 믿나?
기독교 교리를 깊이있게 잘 모르는 처지에서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힌 성경에는 너무나 허황된 얘기들이 많다. 미신 같은 천지창조는 그렇다 치더라도 특히 ‘노아의 홍수’같은 사건들은 너무나 허황되어 보인다. 지금은 주술적 공상시대가 아니라 사물의 이치가 명명백백한 과학시대인 것이다. 학교에서 과학을 배운 초신자나 비신자들한테
 성경을 제대로 이해시키려면, 성경책 뒷부분에 해명성 해설기사(?)라도 함께 실어서 독자를 합리적으로 설득할 수 있어야 옳을 것이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문제로 제기한 노아의 방주나 노아의 홍수 얘기도 그렇습니다. 40일 동안이나 비가 내렸고 그 비가 천하의 산들을 다 뒤덮는 대홍수가 되었다는 사실이 언뜻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박사학위를 가진 수백 명의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창조과학>을 조금 더 인용을 하면 성경은 노아의 방주가 유프라테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라랏 산 꼭대기에 머물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그 홍수가 유프라테스 강 정도를 범람시킨 국부적 홍수였다면 노아의 방주는 강 하류를 따라서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갔을 것입니다. 대홍수에 대한 전설기록은 지구 도처의 많은 민족들 간에 공통되게 전해지고 있는데 그 설은 지금까지 수집된 것만해도 270가지가 넘는다고 합니다.
특히 미대륙 인디언들이 남겨놓은 점토판에는 노아의 홍수 사건이 아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궁창 위의 물로 인해 일그러져 보이는 태양, 물 속에 빠져서 아우성치는 사람들, 비가 내린 40주야를 상징하는 40칸의 네모판 그림, 나뭇잎을 문 채 날고 있는 새, 커다란 배, 그리고 그 옆에서 하늘을 향해 경배를 올리고 있는 네 남자와 무지개가 뜬 가운데 배로부터 각기 한 쌍씩 나오고 있는 갖가지 동물들의 모습이 그것입니다. 일찍이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었을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어떻게 노아의 홍수 사건을 그토록 성경 내용과 똑같이 묘사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담으로부터 시작돼 인류의 번성은 홍수 이후 노아의 가족을 유일 조상으로하여
 다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연평균 지구상의 인구가 0.5%씩 증가했다고 했을 때, 노아의 가족인 네 쌍의 부부로부터 현재의 50억이 넘는 인구에 도달하기까지 대략 4,000년의 기간이면 충분하다는 계산입니다. 창조론은 미신이 아니라 과학이고 역사학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무지를 앞세워 성경의 엄연한 사실 역사를 ‘허황된 얘기’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얄팍한 지식이 아닌, 진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젊은이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16. 팔자 편한 사람들이나 다니는 곳이 교회 아닌가?
찐빵의 생각- 교회는 ‘팔자’ 좋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쪽이라는 사실을 젊은이가 올바로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이루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고뇌와 비탄 속에서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앞에 영육의 전부를 의지하고 사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 이들이 함께 모인 ‘천국’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행복한 인간들을 축복하려고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죄 많고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을 감싸안으며 그 가엾은 영혼들을 구원할 오롯한 목적 하나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혹스런 운명의 꼬임도 말씀의 능력을 통해 한 수간에 다 풀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 모든 고통의 원인, 모든 죄악의 무게와 그 본질을 누구보다도 훤히 다 꿰뚫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떠서 교회를 바로 보고, 그리고 눈을 감고는 자신의 모든 무거운 짐들을 그분 앞에 살며시 내려놓아 보기를 권합니다. 우선은 성경말씀을 한 번 찬찬히 읽어보는 것이 순서일 줄 압니다.

17. 동정녀 마리아의 잉태 이상하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의심은 세상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당연한 의심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인간세상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게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그 아드님, 즉 우주에 유일하신 신의 세계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은 죄악으로 물든 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내려 보내야겠다고 마음먹은
 하나님의 뜻, 즉 성령에 의해 마리아의 몸을 빌어 잉태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우리네 보통 인간으로 보려 하는 데서 부터 젊은이의 잘못이 비롯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억조창생을 다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짦은 경험과 얕은 지식 잣대로 가늠하려 하는 것은 애초부터가 가당치 않은 일입니다. 흙을 빚어 인간의 형상을 만든 다음 거기에 스스로 생명력의 숨을 불어놓어 우리를 만드신 일에 비한다면 당신이 점지하신 한 처녀의 몸 안에 당신의 아들을 잉태하게 하는 일쯤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그 일의 어렵고 어렵지 않고에 있는 게 아니라 죄악 투성이인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내려 보내셨다고 하는 그 무한한 사랑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 또한 보통의 인간이 아닌 성모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18 건축헌금 무서워 개척교회 못 가겠다
 찐빵의 생각- 알게 모르게 신앙과 물질이 이처럼 자주 정면으로 부닥치는 우리 교회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마음의 평안과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마지막 안식처로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가는 것인데 오히려 안식처가 ‘부담처’가 된다면 그것은교회의 존재 의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어려운 가정경제에 무리를 하면서까지 건축헌금을 하라고 강요하는 교회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또 소수이긴 하지만 어떤 목사님들은 신도들의 경제효율성을 감안하여 아예 독립된 자기 성전을 따로
 짓지 않겠노라고 공식 선포를 하고 대신 학교나 회관등 공공기관의 시설 일부를 빌려서 당당히 목회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일정액의 물질을 드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교회로부터 얻는 정신적인 위안과 축복과 은혜의 분량은
 그야말로 물질이나 숫자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사실입니다. 또 실제로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이나 마음을 그냥 공짜로 받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를 드리면 어떤 형태로든지 반드시 열 배로 되갚아 베푸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과 물질을 드리는 기쁨이나 보람은 마음과 물질을 드려본 이들만이 느껴 누릴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축복이랍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경제적인 능력이 닿지 않으면 건축헌금에 대해서 신경 쓰시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능력대로만 바치면 그것으로 족 합니다. 중요한 것은 금액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늘 들여다보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19 세상 문화를 모두 사탄으로 매도하는 비현실성
 지나친 경건주의인가 아니면 종교 이기주의인가. 우리나라 교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화현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너무 좁은 것 같다. 대중들이 오락으로 즐기거나 예술적 창작 행위로 표출하는 영화, 텔레비전, 음악, 연극, 무용 등은 대부분 다 사탄이라고 매도해 버린다. 음악도 찬송가나 찬양곡만 음악이고 연극이나 영화도 성극이 아니면 다 사탄이다. 특히 전위적인 음악 등 새로운 예술 장르는 아예 악마의 굿거리쯤으로 취급해 버린다. 인류의 정신 사조적 추이와 아름다움의 새로운 가치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예술 창작 표현행위가 다 사탄이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봉건 중세기의 고루한 사고방식만 최고의 가치로 알고 진부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고 싶다. 교회에 식자들은 많으나 새시대를 능동적으로 앞서 개척할 만한 용기를 못 지녔다. 앞선 자는 손해를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현실 안주만을 안일하게 탐하다가는 지난날의 불교나 유교처럼 기독교도 머지 않아 시대에 뒤처진 ‘골동품 종교’로 낙후될지 모를 일 아닌가.
찐빵의 생각- 시대는 계속 변천하고 있으며 가치관 또한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신도 시류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정신도 시류에 따라서 끝없이 각색되고 윤색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향후백년쯤 뒤의 성경 해석이 과연 어떻게 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의 위대함이 어디 있다고 보시는지요?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고 뭇 제국의 흥망성쇠가 수업이 거듭되어도 결코 변하지 않는 황금의 빛처럼 그 가르침의 엄정하심과 예언의 정확하기가 예리한 칼날처럼 오늘날까지 생생한 진리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젊은이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인간 정신 활동이나 행동규범은 본디 제한됨이 없이 움직이는 속성을 지녔습니다. 일찍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모든 시대의 흐름과 인간이 변화해 나갈 모든 몸짓들을
 하나 빼놓지 않고 다 예견하시는 가운데 그 모든 시대와 무든 움직임과 모든 가치들을 빠짐없이 하나로 꿰뚫는 불변의 진리를 말씀으로 남기셨습니다. 그것을 일러 우리는 성경이라 부릅니다. 그것은 율법이기 이전에 우리의 취할 바 행동양식이며 우리가 추구할 바 살아 있는 행동의 규범이 되어왔고 지금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는 그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비타민C라는 물질을 발견한 공로로 1938년도 노벨 화학상을 받은 미국의 과학자 엘버트 젠트교르기 교수가 평생의 과학철학을 집대성한 책 한 권을 만년에 쓴 일이 있습니다. 그책츼 제목을
‘The Mad Monkey'(미친 원숭이) 였습니다. 놀랍게도, 인류의 그가 이룩한 과학문명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는 예견이 그 내용입니다. 새로움의 탐욕에 사로잡혀 끝간데를 모르고 달리는 우리 인간의 초상을 미친 원숭이에 비유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새로움에 집착하지 말기를 권합니다. 언뜻 낡아 보이는 가치를 외면하지 않기 바랍니다. 아무리 빼어난 오늘의 새로움도 내일이면 이미 낡음일 터, 영원히 변치 않는 최후의 가치는 역시 이천 년 전에 우리가 은혜로 받은 단 하나의 말씀뿐입니다. 영민한 젊은이의 두 손을 꼭 잡고 이 말만은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예술도 새로운 과학도 결국은 진리의 말씀 앞에서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20. 무교회 종교론에 공감한다
 고 함석헌 선생의 무교회 종교론을 읽었다. 공감 가는 대목이 많았다. 굳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이 혼자서 성경공부를 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 조직에 얽매이다보면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 받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교회는너무 탐욕적이고 아전인수적이다.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마구 겁준다. 공짜 노력 봉사와 공짜 돈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한마디로 염치가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신도들로부터 챙기면서 감사는커녕 그것들이 다 사람 덕분이라고 했다가는 빚쟁이로 몰릴까봐 그러나? 무에서 유를 창조?속보인다. 공짜만 밝히는 그런 놀부 같은 교회들 말고, 진짜 돈 욕심 없는 흥부 같은 교회가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신도들의 돈을 노리지 않고 자기의 재산을 스스로 바쳐서 하는 목회가 진짜배기 아닐까?) 아무튼 나는 착한 사람은 되고 싶으나 여러 가지 스트레스 때문에 교회에 가기는 싫다.
찐빵의 생각- 젊은이의 경우를 나는 감히 불효자식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부모님의 명령이나 부모님의 부양 의무 따위를 스트레스로 생각하는 불효자식을 보는 듯한 느낌 때문입니다. 불효 자식들에게 일정한 틀이 있지요. “누가 날 낳아 달라고 언제 부탁하기라도 했나?”, “왜 귀찮게 이래라 저래라 내게 명령하나?”, “무슨 유산 물려준 게 있다고 내게 의탁하려 하나?”등등 입니다. 부모와 하나님이 동격이라면 교회는 가정과 동격이 됩니다. 하나님을 부정하면 부모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고, 교회를 부정하면 가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론 부모님과 가정을 버리고, 그렇게 혼자 가출해서도 그럭저럭 연명은 하겠지요. 그러나 그 생애가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젊은이의 과격한 표현은 일시적인 젊은 객기로 이해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 섣부른 무교회 종교론의 지지 배경을 유추하건대 치열한 자기탐구의 벼랑에서 모험적 자기싸움을 통해 나름의 사회과학적 관점으로 설파한 함석현 선생의 소위 ‘무교회 종교론’과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입니다. 젊은이의 주장대로라면 사람은 의학서적 한 권만 있으면 몸이 아플 때도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됩니다.

21 꼭 교회에 가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찐빵의 생각- 종교나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바꿔말해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스스로 자신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특히 젊은 날에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갖기가 쉽지요. 그러나 조금 더 세상을 살아보세요. 자신의 의지나 지혜나 능력만 갖고는 도저히 풀리지 않아 마치 하나의 미로와도 같고 난마와도 같은 거대한 실타래와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미로의 실타래는 말할 것도 없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매사 현명하고 정직하게 산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 인간적인 의지나 지혜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제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난마의 실타래를 푸는 완벽한 해법은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사태는 심각해지는데 함당한 해법이 발견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갖가지 편법을 생각합니다. 편법의 끝은 나락이지요. 미로와 같은 세상험로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 것인가를 대낮처럼 밝혀주는 놀라운 횃불이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횃불을
 만나기 이전의 나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마치 장님과 같았었습니다. 신앙이 필요없다고 말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의 낳으심, 부모의 가르치심이
 나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바보의 세월을 하루라도 빨리 졸업하는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22 광란의 기도원 풍경, 혐오감 준다
 찐빵의 생각- 나는 아직도 교인된 사람의 기도란 조용히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얻는 하나님과의 1:1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감정 표현을 가급적 자제하며 살아온 내 성격 자체가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나 감정, 또는 정서상태가 나와 꼭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입니다. 평소 우리 생활에 비유해 봅시다. 몸이 건강한 사람은 중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은 배고픈 사람의 절실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신체가 정상적인 사람은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처럼 예로 든 모든 경우에 공통되게 쓰이는 단어가 ‘이해’입니다.
이해란 내가 그사람의 처지가 되어 생각해 보는 마음 씀씀이로서의 도량입니다.
누군가가 통곡을 하면서 하늘에 대고 울부짖는 광경을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그사람의 절박한 처지나 심정을 먼저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음을 비운 가장 편안한 상태로 교회에 나와 보세요. 교회는 험한
 세파 속의 ‘방주’랍니다.

23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거짓말!
찐빵의 생각- 현실적인 생각이나 생활에 젖어 살다보면 가끔씩 비현실적인 말들이 우습게 들리는 경우가 참 많지요 예수를 믿으면 장사가 잘 됩니다. 나는 확실히 장사가 더잘 된다고 감히 자신있게 단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기적
 중의 한가지가 바로 비운 만큼 반드시 채워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를 바치면 열을 되돌려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기적, 은혜, 운운하니까 너무 교회식 답변으로 들립니까? 그렇다면 세상 식으로 풀어서 설명하지요. 우선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사상을 닮아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상이란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 남에게 따뜻이 베풀고 이웃을 지성으로 섬기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이웄을 내 몸같이 아껴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범사에 기쁨으로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는 곧 웃는 얼굴의 시발점입니다. 그 웃는 얼굴은 곧 바로 인간관계의 화목과 우애와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실로 하해보다 깊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이렇게 얄팍한 장삿속으로 풀어서 언급한다는 자체가 심히 불경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를 받으시면 열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교회에 다니면 장사가 열 곱으로 번창할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됩니다는 말은 정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모든 사람이 꿈꿔 마지않는 마음부자까지 됩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바로 은총과 축복이시기 때문입니다.

24 하나님의 전지전능, 믿을 수 없는 경우 많아
 새벽기도를 다녀오던 부녀자가 괴한에게 겁탈을 당하고. 수련회에 가던 교회버스가
 벼랑길에서 굴러 떨어져 사상자가 많이 났다는 신문기사를 본적이 있다. 신문에 나지 않은 사건들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이 정말 전지전능하다면 왜 저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나? 세상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위심하게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사가 형통이라지만 그렇게 수많은 교회들은 그렇다면 기도를
 안 했다는 말인가?
찐빵의 생각- 우리사회에는 성범죄가 많고 교통사고가 많고 부정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탓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처방을 따르지 않은 우리 인간들 탓입니다. 딱히 적확한 비유는 아닐지 모릅니다만, “교회가 많아 저마다 기도를 많이 할 것임에도 왜 각종 범죄와 불상사는 끊이지 않고 있는가?”하는 질문은 마치 “우리사회에는 병원이 많아 의사들이 저마다 진료를 하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왜각종질병들이 끊이지 않고 있는가?하는 질문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병원의 존재와 의사 진료행위의 필요성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로 교회의 존재와 기도의 필요성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의사의 차이가 있다면 하나님은 의사의 몸과 두뇌와 그 의술의 길을 만들어 주신 분이시고, 의사는 그의 쓰임 받은 최소한의 도구라는 차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작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안전과 행복과 평안의 완벽한 길을 다 예비해 주셨습니다.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는 정치와 법과 경찰제도라는 인위적이고 물리적인 수단까지도 우리에게 못이긴 척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 은혜의 큰 틀을 생각한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의심해서는 안되고, 생명과 생존조건을 허락해 주신 고마움을 추호도 잊어서는 안될 줄 압니다.

25 종교생활로 인한 각종 제약이 싫어!
찐빵의 생각- ‘자유’라는 말이 지닌 양날의 칼과 같은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단 한 번뿐인 귀한 삶을 사는 동안 종교를 통해 진리의 말씀을 얻어서 그에 따른 믿음 아래 일생을 산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우리 인생의 집을 잘 짓는다는 뜻일 것입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단언합니다. 한때의 젊은 기분에 의한 그런 자유방임의 삶으로는 절대로 성공적인 인생을 일궈낼수 없습니다. 젊은이의 경우뿐만 아니라 이 지구상의 그 어느 뛰어난 누구도 종교에 의한 신앙심이 없이는 자기의 인격적 완성을 도모해 내지 못산다는 뜻입니다. 젊은이의 눈에언뜻 재미없고 답답해 보이는 그사람들을 한 번관심 갖고 관찰해보기를 권합니다. 그들은 불변의 진리 말씀안에서 어쩌면 젊은이보다 열 배나 더트인 긴 안목으로 세상과 세상 이상의 것을 꿰뚫어 내다보려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의 노여움 아래 누리는 세상에서의 재미나 자유는 한 순간에 불과하지만, 진리의 말씀안에서 진리의 뜻대로 일궈나가는 저들의 삶은 젊은이보다 열 배는 더 성공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자, 단 한 번 뿐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제 전적으로 젊은이의 자유이자 책임입니다.

26 교회 요구사항 뻔하다.
찐빵의 생각- 모든 종류의 헌금은 경제 사정이 하락하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인데 젊은이의 표현대로 ‘요구’란 의무로 이해가 되어서는 곤란한 일입니다. 아무리 개척교회라고는 하지만 교회의 필수 비품인 피아노나 성가대 거상조차 마련하지 못한 교회라면 그어려움을 짐작할 만합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를 이렇게 물질적인 면만 가지고 논의를 한다는 자체가 벌써 틀린 일이지요.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하는 데는 사실 피아노나 성가대 비품이 꼭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신실한 신도들이 모여서 그냥 목사님 모시고 무릎꿇고 않아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하니님의 은총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의 가정처럼 신앙생활에 서툰 일부 신도들 사이에서 가끔씩 교회의 물질 ‘요구’에 대한 이견을 재기하기도 하는데 사실을 말하자면 그것이 아무리 ‘엄청난 액수’ 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과 삶의 모든 것’에 비하면 매우 적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거듭 말하지만 헌금이란 결국 그 모든 은혜에 대한 기쁨과 감사의 작은 표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세요. 물질 때문에 이렇게 시험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거나 하는 현실이 나도 참 안타깝기만 합니다.

27 무전여행 때 교회에서 냉대당했다
 나는 무전여행을 좋아한다. 어느 겨울비 오는 날 저녁(지역은 밝히지 않겠음),너무 추운데다가 객지 땅이라 잠잘 곳이 없어 방황을 하던 중 어느 비탈진 주택가 교회 사택엘 찾아갔다. 그러나 예배를 보다 말고 고개를 내민 신체 건장한 목사 내외로부터 들은 말은 “잠자려면 여관에 가야지!‘였다. 그러고는 현관문을 꽝닫아버렸다. 보통 사람보다 더 냉랭했다. 그날밤 나는 얼어 죽을 만치 혹독한 고생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주위로터 전도를 받을 때마다 나는 냉소를 보낸다. 위선자들이여!
찐빵의 생각- 우리가 합리적인 이성을 갖고 생각을 정리해 보자면 잘못의 근원은
 젊은이의 ‘무전여행 버릇’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전여행이란 말 그대로 내돈 없이 그냥 공짜 여행을 해보겠다는 심산 그 자체지요?
먹고 자고 씻고 목축이고 하는 일들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고 순전히
 생면부지의 누군가한테 폐를 끼침으로써 해결한다면 그것이 옳은 일, 양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생각지 않고 남의 정상적인 반응 만을 섭섭하게 여긴다면 너무 이기적인 행각이 아니겠습니까? 외국의 젊은이들이라면 그런 경우,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일일노동을 해서라도 어떻게든지 자력으로 여비를 벌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하나 지적하자면 젊은이의 세상을 보는 시각입니다. 옳은일, 귀한 일이 무엇인가를 스스로의 이성과 지성으로 능동적인 판단을 하려 하지 않고 전작에 누군가가 내게 어떻게 했으므로 그것이 못내 섭섭하니 옳은 일, 귀한 일도 결국 내 알 바 아니다 하는 식의 무책임한 막된 반응은 누가 보더라도 유치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거나 위함을 받으려먼 내가 먼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자 하는 마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며 주님의 말씀이기도 하답니다. 남에게 페를 끼치기만 하면서 남들이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어리광을 부리는 일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나 할 짓입니다. 교회에 다녀보세요 곧 어른이 될 것입니다.

28 목사는 결혼을 한다. 그게 벌써 세속적이다.
찐빵의 생각- 개신교 성직자와 천주교 성직자를 그런 단순한 방식으로 평면비교를한다는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중요한 것은 개신교냐 천주교냐가 아니라 성직자 개개인의 신앙심과 신앙적 삶의 실천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교리를 잘 모르니까 신부님들이 왜 결혼을 하지않는지 그 까닭을 설명할 재간이 내게 없습니다만, 목사건 간에 인간이면 누구나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지극히 합당한 하나님의 섭리이자 명령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신교는 목사가 결혼을 하기 때문에 싫다는 식의 논리는 젊은이가 말씀 이전에 우선 인생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비롯된 선입견의 오류라고 여겨집니다.
편협한 선입견으로 겉으로 보이는 형식의 어느 일부만을 보고 그것이 사안의 본질
 인양 속단하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 중에는 머리 좋은 자녀를 두어 좋은 교육기회를 획득한 경우도 더러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신의 일반적인 가정생활을 송두리째 희생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뜻을 구현하는 데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실제로 내가 만난 한 선교사님은 가족과 함께 아프리카 빈국 오지에 파송되어 지금 9년째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현지의 풍토병으로 5살 난 딸아이를 잃은 슬픔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선교사는 지구상의 ‘가장 낮은 곳’인 그 땅에 자신의 뼈를 묻을 각오로 움막 침소안에 자신의 관을 짜 매달아 놓고 선교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까지도 젊은이는 ‘결혼 때문에 세속화한 성직자’로 보려합니까?

29 현찰로 돈 내면 나중에 천당에서 갚겠다.
찐빵의 생각- 우리는 하나의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 가령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라는한 인물의 생애를 떠올려 볼 때도 과연 그를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세상의 경제관념 안에 끌어들여서 계산적 인간, 타산적 생애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분은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얻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면서 까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를 우선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을 얼마나 바라고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우리를 제 생명처럼 아껴키워주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나름대로 때마다 물질을 바친다고는 하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의 만분의 일도 되지 않는 아주 적은부분에 불과합니다. 가능만 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뜻을 실천하고 그 사랑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 일테면 생명까지도 바칠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우리 주위에는 실제로 많고 많습니다. 언뜻 젊은이는 경제논리에 밝은 듯이 보이나 그 경제논리가 세상 이치의 전부는 결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재물을 수치로 따져 재는 경제논리보다 훨씬 더 놓은 가치의 덕묵들이 우리 인생에는 얼마든지 있답니다. 실제로 우리 주의에 보면 제 가진 것의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 다 드리면서도 세상의 그 어떤 재벌보다 훨씬 더한 행복과 평안과 감사를 누리며 사는 훌륭한 분들이 참 많습니다. 세상의 돈은 세상의 일을 위해 쓰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돈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입니다. 그 차이도 한 번쯤 생각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30 유흥업을 하는 집안인데 어떻게 예수를 믿나?
찐빵의 생각- 예수님이 만일 오늘날 우리 곁에 가까이 살아 계신다면 틀림없이 그런 유흥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차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차별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해와 긍휼로 감싸안아 위로하심으로써 저들 스스로가 저들이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헤아려 자성토록 만드실게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직업 때문에 예수님을 등지고 살 게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예수님을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가서 그의 가르침도 받고 사랑도 받고 구원과 축복도 받아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선은 젊은이 자신이 먼저 교회에 나가 예수님과 만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그런 일들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부자나 가난한 이나 사람이 하루 세 끼 밥먹고 살기는 마찬가지인데 왜 하필 우리는 그런 ‘어려운 직업’을 통해서만 밥을 벌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성도 자연히 그 다음에 따라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게 되면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를 예외 없이 다 그분이 손수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주 하나님’, 즉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직업 때문에 지금 겪고 있는 젊은이의 내적인 고충을 십분 이해합니다. 아마 하나님께서는 열배, 백 배로 더 깊이 이해하고 계실 것입니다.

31 부흥집회 가보고 어이가 없었다
 찐빵의 생각- 잘은 모르겠지만 젊은이는 모처럼 부흥회에 가서 속알멩이는 보지 못하고 겉모양만 보고 온 것 같군요. 만일 젊은이가 가서 본 광경이 사실이라면 나부터도 거부감이 일어났겠다 싶긴 합니다만, 젊은이의 표현과 같은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났던 상황일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군요.
젊은이가 무엇을 잘못 보았거나 아니면 젊은이가 운 나쁘게도 정말 질이 낮은 사이비 종파의 집회엘 잘못 갔다왔던 게 아닌가 여겨집니다. 제대로 된 부흥회라면 많은 사람들이 ‘식어가는 믿음에 기름부음을 받고 다시금 뜨겁게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확인하는 은혜로운 자리’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는 어느 날 우연히 부흥집회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신앙적인 거듭남의 놀라운 경험을 한 이들이 부지기수로 많답니다.
내가 젊은이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신앙의 실체를 무슨 일회용 시험대인양 어디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스스로 눈을 감고 엎드려 자기 심성 속에서 하나님 말씀의 음성을 듣고자 부단히 노력해 보라는 것입니다. 마음만 열면 ‘진짜배기’ 하나님은 우리 마음 안에 계십니다.

32 형제, 자매, 장로, 집사......호칭 이해 안 가
 교회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쓰지 않는 호칭을 좋아하는 것 같다. 아무개씨, 아무개 양 하면 될 걸 가지고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는데 어색할 뿐만 아니라 다소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른 들으면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지극히 배타적인 뉘앙스가 깔려 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은 형제, 자매가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족속이 다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말은 하면서 어찌 그리 끼리끼리만 놀고 배타적인가. 내가 보기엔 논리에 모순이다. 장로, 권사, 집사 하는 유별난 비사회적 호칭도 특정 계급 사회의 도구로 여겨진다. 끼리끼리 노는 교회 말고, 세상 가운데 탁 트인 교회는 있을 수 없는 것일까.
찐빵의 생각- 형제님, 자매님은 젊은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편가르고 놀자는 배타적 목적에서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친근감, 동류감의 호칭이라고 가볍게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굳이 따지기로 말하더라도 원래 세상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자손임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자손도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자손됨을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라도 그렇게 고백만 하고 나면 금세 형제 자매가 될 수 있지요. 그것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순리와 화합을 전제로 한 선의의 관행입니다. 당연히 젊은이 자신도 하나님의 크신 진리와 섭리 앞에 자신을 고백하면 형제가 됩니다. 고백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선한 이웃’이겠지요. 그리고 장로, 집사 같은 호칭도 함께 지적했는데 그것은 교회조직을 계급사회로 잘못 본 데서 온 오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의 직급이나 호칭은 계급으로 누르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엎드려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사회의 다른 이름은 바로 ‘봉사사회’이지요. 봉사를 제대로 하려면 누구한테나 나름의 일몫이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규범도 필요하겠지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열린집단’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산의 유무를 막론하고 배움이 있고 업고를 막론하고, 심지어는 국적이나 인종이나 이데올로기까지도 초월해서 교회는 누구한테나 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교회는 특정 집단 누군가의 소유가 아니라 천하 만인을 위한 하나님 소유의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33 가정을 파괴하는 광신적 교회생활 목격했다
 우리 이웃에 중학교 선생이 산다. 부인은 각종 교회행사는 물론 툭하면 철야예배, 툭하면 새벽기도, 기도원 나들이, 각종 전도행각은 물론 남편이 갖다 준 월급도 생활비보다는 교회에 더 많이 갖다 바치는 바람에 늘 빚을 진다는 소문이고, 그 집 아이들은 엄마가 늘 집을 비우는 바람에 학교공부도 엉망이고, 특히 큰 딸은 불량소녀가 되어 밖으로만 나다닌다. 어느 날 남편은 교편생활도 집어치우고, 엄청난 불화 끝에 결국 그 가정은 풍비박산 되고 말았다. 동네사람들은 종교가 마약처럼 무서운 것이라고 수군댄다. 어느덧 교회는 내게 은연중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찐빵의 생각- 이 세상의 어떤 교회에서도 교인들한테 제 가정을 뒷전에 팽개치고 교회에만 몰두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우리의 개개 가정을 말씀과 은혜의 보금자리로 잘 섬겨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교회와 가정 둘 중 어느 쪽이 우선이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단연 가정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뜻입니다.
어느 경우라 할지라도 건전하고 건강한 가정의 토양 안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 올곧게 뿌리내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원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말씀을 통해서 생명의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젊은이가 목격한 그런 특수한 사례로 인해 교회를 ‘공포의 수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34 세무조사 결사반대, 이해 안 돼
 국법앞에서 또는 국민의 신성한 의무 앞에서 만인이 평등해야 하는데 교회는 독불장군인가? 신성불가침의 성역인가? 국민의 세금은 국민을 위해 쓰인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눈에 드러나지도 않게 들어오는 엄청나게 많은 그 교회 수입을 국민을 위해서는 쓰지 못하겠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교회가 언제부터 막강한 정부도 무시 못할 정도로 그렇게 어마어마한 압력 단체가 되었나? 물질과 교세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나?
찐빵의 생각- 세무조사란 결국 정부가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뜻을 전제로 한
 발상일 터인데 그렇다면 그 발상이 우선 잘못된 것이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사견입니다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교회는 정부의 행정적 장악대상, 규제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동시에 교회의 모든 제도와 모든 인력과 모든 능력과 모든 종교적 성과과 모든 재산은 다 하나님의 것일 뿐입니다. 이 대원칙 아래서 교회는 나름대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사회적인 봉사를 하고 구제사업도 하고 도덕적인 규범도 만들어 운위하면서 우리 사회를 좀더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나가는 데 일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물질로 환산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교회의 여러 가지 좋은 활동은 눈에 보이는 부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많고 큽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만인의 평등을 위하고자 하는 기독사상이야말로 근대 정치사의
 현주소를 있게 한 민주주의 사상의 근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지역은 오늘날 다 선진국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일부 지역은 비참한 후진국으로 전락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만일 젊은이의 말대로 우리 교회가 정부의 세무조사에 결사 반대하고 나선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교회의 물질이나 재산을
 보호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거룩하신 주권을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나라를 융성의 대로로 이끌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진정한 애국이라면 우리 교회들이 누구보다도 가장 앞장서 왔습니다. 지금도 가장 앞서 있습니다. 모든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야말로 세금 몇 푼과 감히
 비교될 성질이 아님을 기억하세요.

35 양보 모르는 기독교계, 압력집단인가?
기독교를 조금만 깍아내리거나 현실적으로 손해가 예상되는 일이 발생하면 교계가 온통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광경을 자주 본다. 종교철학의 참 뜻은 조용히 기다리고 양보하고 말없이 손해를 감수하는 데 있지 않나 싶은데 오늘날의기독교는 그 영악한 현실 감각이 일반 사회의 집단보다 더 지독한 것 같다. 그것이 뭐 꼭 어떻다는 건 아니다.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튼 뭔가 논리상 앞뒤가 안 맞는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찐빵의 생각- 실제로 인류의 역사를 보면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소위 종교전쟁이라는 살육전도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것입니다. 아니, 지구촌의 어느 지역에서는 아직까지도 저들 나름의 심각한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참이지요.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닙니다만, 아무튼 기독교가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내려다보실 때, “아, 저들이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구나.”하고 안타까워 혀를 차시겠지요. 크든 작든 이 부분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반성해야 옳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돌아볼까요?
현재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 인구는 1천 3백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 인구의 1/4이 넘는다는 얘기이지요. 인간이 집단화하면 거기에는 조직이 결성되게 마련입니다. 조직에는 또 책임이라는게 따르게 마련, 그 책임이란 일차적으로 ‘교권수호’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리고 교권이란 교리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이 다 포함됩니다. 게다가 우리 사회 자체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어서 우리 기독교만 있는 게 아니라 타 종교들과 함께 보이지 않는 세력을 형성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의 우리 기독교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선지자들이 ‘양보와 손해’를 감수하면서 말없이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까? 순교의 거룩한 피로 얻어진 교권은 우리가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기도 하며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 자체이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정작 중요한 것은 젊은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우리 기독교계가 얼마나 많이 양보하며 참으며 기도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36 죽은 후 사람은 과연 천당에서 영생할까?
잘은 모르지만 기독교 교리 중에 교회에 다니면 죽어서도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 영생을 보장한다는 말이 있다는데 믿어지지 않는다.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이 원시 미신시대도 아닌데 그런 황당무계한 교리가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까?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부활했다는 주장도 미안하지만 믿기가 어렵다.
찐빵의 생각- 우리네 인간 세상이라는 게 당장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결과나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이해를 한다는 뜻이지요. 성경의 교리도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세상만사를 통해 얽히고 설킨 모든 생각과 행동의 결과에서 마침내 도달하게 되는 귀납적 공약수를 엄정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말씀들이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과연 죽어서도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지극히 쉬운 이 말 하나만을 놓고 우선 생각해 봅시다. 멀리 천국까지 갔다 올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네 가까운 인간사회에서도 영생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육신만 있는 게 아니고 영혼도 함께 있다는 사실마저 부인하지 않겠지요? 그래서 영육이라는 단어도 있지 않습니까? 이순신 장군 또한 죽은지 380년이 넘었지만 그 혁혁한 충절 호국정신은 아직도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서 어느 한 순간도 죽지 않고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왕성한 생명력과 더 큰 영향력으로 민족정신의 등불이 되어 옹휘롭게 살아 있습니다. 사후의 세계라면 굳이 먼 데서 찾을 필요조차 없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젊은이는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까? 천당과 지옥을 따로 어렵게, 멀리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다 선과 악의 경계를 구분지어 놓으신 하나님의 엄정하신 섭리에 의한 결과입니다. 천당과 지옥은 당장 믿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 변할 수 없는 섭리의 뿌리에 대해서는 젊은이가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젊은이 스스로가 영생의 진정한 의미까지도 알아 차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가신 지가 2천년이나 가까이 되었지만 그분은 살아계실 때보다 몇 백 곱절, 몇 천 곱절 더 한 사랑의 위력으로 오늘날 우리 지구촌의 존재가치와 존재의의를 형성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그분은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 보좌의 우측에 앉아 우리에게 선과 악,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를 그어 주실 것입니다. 제눈은 믿지 않더라도 진리는 믿어야 그것이 참된 인간입니다.

37. 밤에 보면 붉은 십자가가 너무 많다.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과연 그렇게 많이 생겨나야 하는 것인지? 우리 집은 지대가 약간 높은 데 밤에 내려다 보면 시내가 온통 붉은 십자가 투성이다. 심지어 지하층은 술집, 2층은 당구장, 3층은 교회와 전당포, 4층은 잘 기억이 안 나고, 5층은 불교 포교원이 들어있는 변두리 건물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곳에서 무슨 거룩한 신앙심이 생기겠나 싶다. 각종 교회는 과연 그렇게 많아야 하나? 너무 많이 양산되는 신학생들 때문일까? 죄악이 너무 많은 도시이기 때문일까?
찐빵의 생각- 몇 달 전 기독교 텔레비젼 방송국에서 구 소련지역으로부터 우리나라
 선교사의 안식년 귀국길에 함께 따라온 한국인 3세 소녀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소녀들은 우리 선교사에 의해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된 사연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녀들의 첫인상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들은 서툰 우리 말로 “서울에 와서 밤거리에 붉은 십자가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보고는 복받쳐 오르는 감격에 마구 눈물이 났습니다. 한국이야말로 하나님의 세상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국 서울이 참 부럽습니다. 구 소련지역은 수십 년 동안 종교의 자유를 박탈당한 동토의 땅이었음을 젊은이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흔히 보는 십자가지만 저들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그렇게 은혜롭고 감사한 축복의 풍경으로 그렇게 눈에 비쳤다는 얘기입니다. 한 겨울에 우리나라에 찾아온 동남아 관광객들은 하얀 눈천지 그렇게 아름답고 부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초록색 나무나 하얀 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흔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는 이에 따라서는 그것들이 귀하고 값진 존재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 주었으면 싶습니다. 십자가가 많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인지를 우리는 모른 채 무심히 살고 있습니다. 젊은이의 글에는, 변두리 밀집지역의 ‘멋없어 뵈는 군소 교회들’얘기가 있는데 지하에 술집이 있거나 말거나 당구장이 있거나 말거나 아무튼 도시 변두리 지역의 그런 곤비스런 환경에 사는 사람들한테도 그리스도의 복음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하나님의 십자가는 우뚝 서야 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이제부터는 십자가 하나하나를 귀하고 예쁘게 보아주세요.

38. 개척교회 과잉 경쟁 지겹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단지 상가 건물에 앞뒤로 층층이 개척교회가 세 개나 있다. 서로 신도끌어오기에 어찌나 경쟁이 심한지 겁나서 얼씬도 하기가 싫다. 주일날 이면 각 교회들이 신도들을 동원하여 저마다 노란색 어깨띠를 두르고 교회 입구 길목을 지키고 ‘호객행위’와 같은 짓을 한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그 광경을 보고 쑤군쑤군대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한마디로 지겹다. 천주교는 그런 일이 없다는데....
찐빵의 생각- 미안한 얘기 같지만 젊은이와 같은 경우를 내가 당했어도 아마 비슷한 거부반응이 일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얘기가 정말 과장 없는 사실이라면 물론 일부
 소수의개척교회에 해당하는 일이겠지만, 그 목적이 아무리 좋은 것이었다 해도 역시 방법론에 있어 전혀 은혜롭지 못한 처사로 지적되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소견이 내게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는 시각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이 그것이지요.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예컨대 똑같은 개구쟁이 짓이라도 내 자식이 그것을 하면 귀여운 재롱이 되고, 남의 자식이 그것을 하면 귀찮은 말썽짓거리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나도 오래 전 동네에서 그와 비슷한 경우를 목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아, 교회하나를 개척해서 자리를 잡기가 저토록 힘든 것이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이 하는 일의 목적이 교회의 부흥이라는 좋은 쪽의 의욕이 있음을 헤아렸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열성 신도들의 그런 과잉 태도가 반드시 그 교회 목사님의 지시나 생각이 아닐 확률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마음 약한 목사님들은 자신의 본래 뜻이 아니더라도 기존 신도들의 열성적인 어떤 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만류를 하지 못하는 수가 실제로 허다하답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더러 숲 전체를 보려 하지 않은 채 부분적인 나무만 보고서는 숲 자체를 잘못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곤 하는데 어떤 경우라 하더라도 나무 몇 그루 때문에 숲 전체를 잘못 넘겨 짚은 일은 없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사회 곳곳의 많은 개척교회들이 그 여러운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참말씀을 실천하고자 남몰래, 말없이 훌륭한 헌신과 희생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큰 교회라 할지라도 맨 처음에는 다 영세한 개척교회였다는 사실까지 아울러 생각해 주기를 권하고 싶군요.

39 신체장애 때문에 사람 많은 곳에 안 간다
 나는 소아마비와 골수염으로 하체를 쓰지 못한다. 목발이 없으면 걷지도 못하는 것이다. 나는 남들이 다 가진 여자 친구 하나 없다. 교회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그것은 나와 같은 사람의 사정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로 대표적인 곳이 아닌가.
찐빵의 생각- 개인적으로 젊은이가 매우 두뇌가 영리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젊은이는 대학에서 성적도 뛰어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도 프로고. 독서량도 많아 문필도 뛰어나며, 두 다리가 좀 불편할 뿐
 신체가 건강하여 남자다운 두 팔의 완강한 근육은 보기에도 듬직합니다. 훌륭하신
 부모님도 계시고, 통기타 솜씨 또한 대단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젊은이는 좋은 교육을 받았고, 무엇보다 나이가 젊습니다. 앞으로 무한한 가능성이 보장되어 있는 셈이지요. 젊은이는 나보다 시력이 좋고 청각도 좋고 손재주도 좋습니다. 말하자면 너무나도 많은 축복 가운데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에 열거한 모든 조건들은 목발을 짚는다는 사실 말고는 훌륭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충분조건을 두루 다 갖추고도 남음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젊은이가 그런 정도의 장애를 이유로 대중 앞에 나서기를, 특히 교회에 나가기를 꺼려한다면 세상에 그것처럼 바보짓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심신이 곤고한 자를 특별히 더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당장 힘차게 집을 나서기를 권합니다.

 <교회 경험이 있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40. 각종 모임 참석 강요 너무 많다
 교회 구성원으로 버티기가 힘들 정도로 교회에는 각종 모임, 집회가 너무 많아서 참
 부담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연중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흥회, 각종 사업, 각종 행사, 각종 교육, 각종 직분과 사역 때문에 정신이 없다. 모임에 빠지면 보이지 않게
 미운털이 박히는 것 같아 그것도 은근히 부담스럽다. 내 경우, 직장생활에 쫓기면서 교회가 강요하는 각종 모임에 다 참석한다는 게 참 무리다. 원만한 사회생활과 자기 발전을 위한 현실적인 시간관리에 지장이 많은 게 솔직한 고백이다.
찐빵의 생각- 아무리 교회에 성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간인 이상에는 가끔씩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귀찮아 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우리 인간의 인간적인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교회를 지켜야 하는 것은 교회가 본래부터 지닌 사명을 어느 경우에도 외면할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명이 바로 예배, 전도, 친교, 봉사라는 네 가지 일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교회의 일에 임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즐겁게 신명을 내서 하는 경우가 있고, 마지못해 하는 경우가 있는데 누군가가 만일 타인의 눈치를 의식하여 후자 쪽에 서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의 방식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힘들게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 비교해 본다면 너무나도 미미한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의 일을 할 때의 마음 자세는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강조하고 싶군요. 은혜의 옷을 입고 교회의 일도 즐겁게 하고, 또 그렇게 해서 얻는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사회생활도 열심히 할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람직한 일이 없겠지요. 한 가지 일을 하자니 또 다른 하나의 일을 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나는 능히 두 가지 일을 모두 즐겁게 잘 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41. 기업화된 교회, 웅장한 교회가 주는 위화감이 싫어!
외국의 교회는 아음이 참 편하고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귀국해서는 교회에 다닐 마음이 나지 않는다. 치밀 주도한 각종 헌금체계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관리하는
 교회! 일반 대기업과 무엇이 다른가?

찐빵의 생각- 교회가 기업화되어 있다고 한 말은 아마 오늘날의 교회 재정 운영 체계가 그만큼 조직화, 능률화,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인 듯 싶습니다. 효율화를 추구하고 있음에 대한 평가인 듯 싶습니다. 실제로 큰 교회들에서는 이미 컴퓨터 전산망을 통해 재정관리를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람이 많다 보니 살림 규모도 커지고 살림 규모도 커지다 보니 또 그 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재무 관리 기법이 도입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특히 신도들 한분한분이 귀히 바친 헌금을 낭비 없이 제대로 관리하여 옳은 곳에 정확히 사용 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헌금 받기를 즐겨 원한다기보다는 신도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제 가진 물질의 일부를 돌려드릴 줄 알게 되기를 원하고 있다고 해야 더 옳은 답이 됩니다. 교회는 하니님의 말씀과 신도들의 믿음을 이어주는 항구 역할을 할 뿐인 것입니다.
밖에서 외형만 쳐다보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서 교회가 하는 여러 가지 좋은 일들에
 직접 동참해 보시기를 먼저 권합니다. 이 세상에는 규모가 작아서 좋을 일도 있겠지만, 규모가 커서 좋을 일들도 더 많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군요.

42. 빈민구제 외면하는 교회, 이해 안 돼
 찐빵의 생각- 젊은이가 말하는 빈민구제는 교회의 임무 중 아마 ‘봉사’ 영역에 해당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갖가지 어려운 여건 가운데서도 참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압니다. 물론 사회 구석구석에서의 구제사업도 포함됩니다. 먹지 못하는 이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 일차적인 일 말고도 예컨대 빈민촌에서 탁아소 봉사를 한다든가, 낙후된 농촌지역에서 영농선교와 함께 부업지도를 한다든가, 식수난으로 고생하는 외딴섬들을 찾아다니며 우물을 파준다든가,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준다든가, 불우노인들을 돕는다든가, 무의탁 장애인들을 맡아 거둔다든가, 윤락여성들을 돕는다든가, 교도소를 찾아 다니며 수형자들을 돕는다든가, 무료 의료봉사를 한다든가, 극빈계층의 법률상담을 해준다든가, 학용품 책 의류들을 수집하여 저들을 돕는다든가 하는 일들을 각지의 개교회 목회 사역자들과 크고 작은 선교단체들이 지금 이순간에도 땀흘리며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43. 교회에는 쓸 만한 총각이 없다.
찐빵의 생각- ‘데이트다운 데이트를 잘 리드’ 한다는 게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으나 젊음이의 기분대로 ‘박력’이나 ‘재미’만으로 ‘괜찮은 남자’의 자격 기준을 삼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그렇게 단세포동물일 까닭이 없습니다. 인간의 품성을 제대로 평가하자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기준 요건들이 따라야 하는 것인지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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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인간 이병철 “신이 있다면 자신의 존재 왜 드러내지 않나”
[중앙일보] 입력 2011.12.17 01:15 / 수정 2011.12.17 01:15 이병철 회장, 타계 한달 전
 천주교에 24개항 종교 질문 … 차동엽 신부, 24년 만에 답하다
1987 이병철 회장 “신이 인간 사랑한다면 왜 고통·불행 주는가 ”
2011 차동엽 신부 “신이 준 건 자유의지 … 그것 잘못 쓸 땐 고통 ”잠자던 질문이 눈을 떴다. 무려 24년 만이다.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1910~87) 회장이 타계하기 한 달 전에 천주교 신부에게 내밀었던 종교적 물음이 언론에 처음 공개됐다. 24개의 질문은 A4용지 다섯 장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신(神)이 존재한다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라는 첫 물음부터 “지구의 종말(終末)은 오는가?”라는 마지막 물음까지, 경제계의 거목이 던졌던 종교적 질문에는 한 인간의 깊은 고뇌가 녹아 있다. 그 고뇌는
 오늘을 사는 우리의 종교적 물음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이 질문지는 1987년 ‘천주교의 마당발’로 통하던 절두산 성당의 고(故) 박희봉(1924~88) 신부에게 전해졌고, 박 신부는 이를 가톨릭계의 대표적 석학인 정의채(86·당시 가톨릭대 교수) 몬시뇰에게 건넸다. 정 몬시뇰은 답변을 준비했고, 조만간 이 회장을 직접 만날 예정이었다. 그러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건강이 좀 회복되면 만나자”는 연락이 왔지만, 이 회장은 폐암으로 한 달 후에 타계하고 말았다. 문답의 자리는
 무산됐다. 정 몬시뇰은 20년 넘게 질문지를 간직했다. 그러다가 2년 전 제자인 차동엽(53·인천가톨릭대 교수·미래사목연구소장) 신부에게 질문지가 들어갔다. 차 신부가
 여기에 답을 준비했다. 그 답을 모아 연말에 『잊혀진 질문』(명진출판사)이란 책을
 낸다.
8일 경기도 김포의 미래사목연구소에서 정 몬시뇰과 차 신부를 단독 인터뷰했다.
가톨릭 신자이자 서강대 총장을 역임한 손병두(70) KBS 이사장도 자리에 함께했다.
교계의 최고 원로인 정 몬시뇰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차 신부님에게 넘어갔네요”라고 운을 뗀 뒤 “이건 이병철 회장이 죽음을 앞두고 한 인간으로서 던졌던 인간과
 종교에 대한 깊은 물음이다. 차 신부님이 요즘 세대의 젊은이들도 공유할 수 있게끔 잘 풀어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차 신부는 “몬시뇰께선 제 스승이시다. 종종 뵙고 교감한다. 몬시뇰께 배운 가르침을 제가 대신 풀어냈을 뿐이다”고 답했다. 손 이사장은 삼성그룹 비서팀에서 10년간 이병철 회장을 보필했다. 탁자 위에 놓인 질문지를 본 손 이사장은 “당시 회장 비서실에 있었던 필경사의 필체가 틀림없다. 딱 보니 알겠다. 이 회장께 보고서를 올릴 때면 필경사가 깔끔하게 다시 써서 올렸다. 오랜만에 이 글씨를 보니 참 반갑다”고 말했다.
질문지를 손에 들고 쭉 훑어보던 차 신부는 “이 질문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라. 모든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던지는 종교적 물음과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마주 앉은 차 신부에게 물었다. 이병철 회장이 던졌던 인간과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잊혀진 질문’을 24년 만에 다시 던졌다. 차 신부는 “이 질문지에는 지위고하도 없고, 빈부도 없다. 인간의 깊은 고뇌만 있다. 나는 그 고뇌에 답변해야 하는 사제다. 그래서 답한다”고
 말했다.
글=백성호 기자
 첫 질문은 둘러가지 않았다. 바로 과녁의 정중앙을 향했다. “신이 있는가. 있다면 왜 나타나지 않나.” 역사 속에서 수없는 무신론자가 던졌을 물음이다. 무신론자뿐만이 아니다. 수많은 유신론자도 기도 속에서 묻고, 또 물었을 것이다. 이 회장의 첫 질문은 그렇게 단도직입적이었다.
물음 1. 神(하나님)의 存在를 어떻게 證明할 수 있나?
답-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결국 개미는 코끼리를 모르는 건가.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 물리학에선 우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흑백TV로 3D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2. 神은 宇宙萬物의 創造主라는데 무엇으로 證明할 수 있나?
- “성경에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돼 있다. 신약성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
 됐다. 그리스어로 ‘말씀’은 ‘로고스(Logos)’다. 로고스의 뜻이 뭔가. ‘원리’다. 다시
 말해 ‘존재 원리’를 뜻한다. 그러니 요한복음서의 첫 구절은 ‘태초에 존재 원리가
 있었다’가 된다. 우주에는 기가 막히게 섬세한 질서가 있다. 결국 그러한 존재 원리,
그리도 섬세한 질서의 근원이 무엇인가라는 거다.”

이병철 회장의 종교에 대한 24개 물음을 담은 질문지. A4 용지 다섯 장 분량이다.●그 근원은 뭔가.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신을 만날 건가의 문제다. 만나면 증명이 되는 거니까. 그럼 신을 어디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가톨릭 신학생 시절, 수업 시간에 은사 신부님을 통해 고(故) 최민순(1912~75) 신부님의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최 신부님은 아침 수업에서 이런 시상(詩想)을 내놓았다고 한다. ‘꽃을 본다/꽃의 아름다움을 본다/꽃의 아름다우심을 본다.’ 이 구절을 듣는 순간, 제겐 충격이었다.”
●왜 충격이었나.
“우주의 철리(哲理)가 사통팔달로 뚫리는 기분이었다. 꽃의 아름다움, 나무의 아름다움, 땅의 아름다움, 하늘의 아름다움이 모두 하나의 고백이다. 변화하는 이 아름다움을,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이신 분이 아니면 누가 만들 수 있겠는가. 결국 한 송이 꽃을 통해서도 신을 체험할 수 있고, 그 체험이 자신에겐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이 되는 거다.”
이 회장의 물음은 ‘창조’에서 ‘진화’로 이어졌다. 신의 창조와 인간의 진화는 양립할 수 있을까. 아니면 철저하게 양자택일의 문제일까. 그건 신학과 물리학이 만나는 가장 현대적인 접점이기도 하다.
3. 生物學者들은 人間도 오랜 進化過程의 産物이라고 하는데, 神의 人間創造와
 어떵게 다른가?
- 차 신부는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150돌, 물리학자-신부의 열린 대화’라는 대담을 중앙일보(2009년 2월 5일자 21면, 9일자 25면)에서 한 적이 있다. 차 신부는 물리학계의 거두인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와의 대담에서 “신이 인간을 빚었나?”
라는 물음에 소상하게 답한 바 있다. 당시 대담 내용을 끄집어내며 차 신부는 답을
 이어갔다.
“‘하느님이 실제 진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이해 방식은 3차원적 사고에 갇힌 거다. 그런 생각은 신앙적으로 더 큰 잘못이다. 초월적 존재의 하느님을 인간의 3차원적 사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그걸 떠나 계신 분이다.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었다’는 건 단지 은유적 표현이다. 오랜 세월에 걸친 진화의 과정을 ‘흙으로 빚었다’는 말로 축약했다고 봐도 된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지구의 환경, 우주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한다. 신이 창조한 생명체도 변화하는 환경에서 생존하려면 끝없이 진화해야 한다. 그런 진화를 인정한다. 그러나 진화론은 창조론이란 더 큰 울타리 안에 포함된 개념일 뿐이다.”
4. 언젠가 生命의 合成, 無病長壽의 時代도 可能할 것같다. 이처럼 科學이 끝없이
發達하면 神의 存在도 否認되는 것이 아닌가?
-“과학이 발달할수록 무신론자가 늘어날까. 흥미로운 조사 결과가 있다. 1916년 미국 과학자 중 40%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고 답했다. 당시 조사를 했던 제임스 류바는 미래의 과학자는 무신론자 비율이 크게 늘어날 거라고 예측했었다. 그런데 1997년 영국의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연구 결과를 보면 딴판이다. 8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미국 과학자의 40%가 여전히 유신론자라고 나왔다. 그 81년간 과학 발전의 총량은
 엄청났다. 그럼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과학과 종교, 대립적 관계가 아닌가.
“과학과 종교는 대립적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발달할수록 신의 섭리가 과학을 통해 더 명쾌하게 증명될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고 말했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말했다. ‘약간의 과학(A little science)은 사람을 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나 더 많은 과학(More science)은 인간을 다시 신에게 돌아가게 한다.’”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하늘과 땅’을 물었다. ‘신과 인간’을 물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사랑의 물결과 고통의 물결을 번갈아 물었다. 신이 사랑한다는데, 왜 우리는 고통스럽냐고. 신이 있는데, 왜 세상에 악인도 있느냐고. 그걸 물었다.
5. 神은 人間을 사랑했다면, 왜 苦痛과 不幸과 죽음을 주었는가?
- “어쩌면 우리가 신을 사랑할 수 있는 중요한 통로가 바로 고통이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1207~1273)는 이렇게 말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생명이 피어난다/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한다. ‘신을 믿을 건가, 말 건가’조차도 선택의 대상이다.
고통의 뒤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 뒤에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럼 고통은 언제 오나.
“고통은 주로 자유의지를 엉뚱하게 썼을 때 온다. 우리의 선택이 신의 섭리, 그 섭리의 궤도에서 벗어날 때 고통이 찾아온다. 그래서 고통은 일종의 ‘경고 사인’이다. 신의 섭리, 우주의 존재 원리, 그 궤도를 다시 찾으라는 신호다. 가령 불에 손을 넣으면 어떻게 되나. 뜨겁다. 고통스럽다. 그래서 재빨리 손을 뺀다. 만약 고통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손이 다 타고 만다.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올바른 궤도를 찾기 위한 신호다.”
6. 神은 왜 惡人을 만들었는가?
- “신이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다. 신은 자유의지를 주었을 뿐이다. 우리 같은 신부는 독신이라 잘 모르겠지만, 부부관계도 비슷하리라 본다.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가두고 소유하려고 하고, 어떤 부부는 상대방을 믿고 자유를 준다. 최고의 사랑은 결국 상대방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이다.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사랑이다. 그러니 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지 않나. 그 사랑을 엉뚱하게 쓰는 이들이 악인이 될 뿐이다.”
7. 예수는 우리의 罪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罪란 무엇인가?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그럼 신은 왜
 우리가 죄를 짓게 내버려두실까. 그 역시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8. 聖經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가?
- “구약성경은 1000년 동안 사람의 입을 통해 구전되던 이야기를 기록한 작품이다.
이것을 짜맞추고, 모자이크해 보니 어떤 그림이 나왔다. 그 그림을 봤더니 ‘하느님
 그림’이었다. 긴 세월, 여러 사람, 다양한 음성을 통해 나온 말이 어쩌면 그렇게 합치될 수 있을까. 물론 표본오차 수준의 편차도 약간 있다. 그건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어투와 성격 때문이다. 신·구약성경에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조가 있다. 그걸 볼 때 성경의 원저자는 저 위에 계신 분이고, 성령이고, 이 밑에 있는 사람들이
 입과 손과 가슴을 빌려준 것이라고 본다.”
 ‘천주교’란 과녁을 향하던 이 회장의 질문은 이제 ‘종교’라는 더 큰 과녁으로 시위를 돌렸다. 종교가 뭔가, 왜 필요한가, 영혼이란 뭔가, 각 종교는 무엇이 같고, 또 무엇이 다른가. 불과 서너 가지 질문에 ‘종교학 개론’의 뼈대가 담겨 있다.
9. 宗敎란 무엇인가? 왜 人間에게 必要한가?
-“벼락이나 천둥이 칠 때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는다. 마취 직전, 수술대에 누운 이들도 기도를 한다. 무신론자도 슬픔에 직면하면 본능적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 그래서 ‘참호 속에서는 무신론자가 없다’는 말도 있다. 우리는 모두 유한한 존재다. 그래서 무한을 동경한다. 영원을 갈망한다. 그런 염원이 하나의 형식이 됐을 때 종교가 된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은 영원을 찾다가 자꾸 벽에 부딪힌다. 부딪힐수록 무한에 대한 동경은 커진다. 결국 동경하던 무한성에 ‘신’이란 이름을 붙인 거다. 그 무한성을 인격체로 여긴 사람들이 그걸 숭배하게 되고, 도움 받기를 청하는 거다. 자신이 그 벽을 넘어설 수가 없으니까. 결국 인간은 종교라는 터널을 통해 영원을 갈망하는 거다.”
10. 靈魂이란 무엇인가?
-“그리스 철학은 유신론이 아니라 자연철학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세 가지 혼이 있다고 한다. 생혼(生魂)과 각혼(覺魂), 그리고 영혼이다. 모든 생물의 중심에 생혼이 있다고 한다. 나무나 풀에도 생혼이 있다. 나무의 수명이 다하면 생혼도 죽는다. 다음은
 각혼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감각하는 동물에겐 생혼과 각혼이 있다. 그리고 사람에겐 생혼과 각혼에다 영혼까지 있는 거다. 물질계를 초월하는 생명현상, 그게 영혼이라는 거다. 영혼이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본래의 인간에 더 가까워진다.”
11. 宗敎의 種類와 特徵은 무엇인가?
- “크게 계시 종교와 자연 종교가 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계시 종교다. 힌두교와 불교는 자연종교에 속한다.”
차 신부의 설명은 간략했다. 이웃 종교에 대한 공개적인 평가라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항목이었다. 질문은 다시 ‘천주교’를 향했다. 이번에는 ‘구원의 범위’에 대해서였다.
종교가 없어도, 혹은 달라도 착한 사람들. 신은 그들을 어떻게 보는지,
이 회장은 물었다.
12. 天主敎를 믿지 않고는 天國에 갈 수 없는가?
- “예전에는 ‘천주교밖에는 구원이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 거의 구원이 없다는
 수준으로 얘기했다. 그러다 바뀌었다.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전환점이었다.
천주교가 좀 더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성찰하고, 다른 종교의 면면을 공부해 보니
 천주교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았던 거다. 그 후에 입장이 바뀌었다.”
●어떻게 바뀌었나.
“‘타 종교인의 구원 여부는 신이 결정할 문제다. 우리는 모른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65년 이전에는 개신교도 다른 종교와 구분 없이 남으로 봤다. 그런데 65년 이후에는
‘갈라진 형제’라고 부른다.”
13. 앞 질문과 내용이 겹친다.
- “앞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하겠다. 내용이 겹친다.”
14. 人間이 죽은 후에 靈魂은 죽지 않고, 天國이나 地獄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 “죽음 너머의 세계는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하다. 이 물음에는 나의 주관적인 신념으로 답을 할 수밖에 없다. 이 한계를 미리 고백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임종 때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우리는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
 한다. 왔던 곳으로 다시 갔다는 뜻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강한 증거가 있나.
“12사도의 죽음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자발적인 죽음을 택했다.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고, 안드레아는 X자형 십자가에서 순교했다. 12사도가 모두 그랬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은 죽음을 불사했을까. 답은 하나다. ‘영원한 생명은 있다.’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12사도의 죽음이야말로 강력한 증거다.”
15. 信仰이 없어도 富貴를 누리고, 惡人 중에도 부귀와 安樂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敎訓은 무엇인가?
-“개그 프로를 보면 ‘이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가 있었다. 불공정한 사회라는 거다. 악인이 버젓이 잘살고 있을 때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부조리 현장에서 신이 침묵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공정 사회를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의 탐욕이다. 한국이 불공정 사회라면 그걸 책임지고 개선해야 할 주체는 신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다. 앞서 말했듯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까지 기회를 주는 거다. 죽기 전에 악인이 회개할
 수도 있고, 새롭게 출발할 수도 있는 거다. 여기서 우리는 오히려 신의 자비를 본다.
벌은 사후 또는 종말 때 주어진다.”
 ‘한국 최고의 부자’가 부자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성경 속의 부자와 바늘구멍. 이 회장의 물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부자란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16. 聖經에 富者가 天國에 가는 것을 약대(駱駝)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惡人이란 말인가?
-“그건 ‘나눔’을 강조한 예수님의 메시지다. 부자에도 여러 종류의 부자가 있다.
이웃과 잘 나누는 부자가 있다면 당연히 천국에 가지 않겠나. 주위를 보라.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선인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100% 선인도 없고, 100% 악인도 없다. 부자도 늘 그런 선택
 앞에 선다. 그 선택에 따라 부자는 선인이 될 수도 있고, 악인이 될 수도 있다.”
17. 伊太利같은 나라는 國民의 99%가 天主敎徒인데, 社會混&amp;#20081;과 犯罪가 왜 그리
 많으며, 世界의 模範國이 되지 못하는가?
-“이 물음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살아보면 상당히 질서가 있다. 물론 마피아가 있지만, 그건 극소수의 범죄집단일 뿐이다. 이탈리아 국민의 평균적
 윤리의식, 그들의 기준은 엄정한 편이다.”
18. 信仰人은 때때로 狂人처럼 되는데, 共産主義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 “이 질문에 100% 동의한다. 다를 바가 없다. 똑같다.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가
 어우러질 때 조화로운 신앙이 가능하다. 이 셋 중 하나가 지나치게 발달하면
 몽상가나 다혈질 행동파가 될 수도 있다. 주로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다. 오직 믿음, 오직 실천, 오직 성장, 오직 복지, 오직 우(右),
오직 좌(左), 오직 사랑,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한 것이다. 종교든, 이념이든 보편성을
 잃을 때 미치게 되는 거다.”
19. 천주교와 共産主義는 相剋이라고 하는데, 천주교가 많은 나라들이 왜 共産國이
 되었나? 例: 폴랜드 등 東歐諸國, 니카라구아 등
- "공산주의는 천주교 신자가 택한 것이 아니다. 천주교에서 이탈한 무신론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거다. 공산권에서 종교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협력 관계나 우호적 관계가 아니었다.”
1989년에 사회주의권 몰락이 시작됐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은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기 2년 전에 던진 것이다. 질문의 시점과 답변의 시점에 시대적 시차는 있다.
20. 우리나라는 두집건너 敎會가 있고, 信者도 많은데 社會犯罪와 試鍊이 왜 그리
 많은가?
- “통계청 조사를 보면 종교인의 범죄 비율보다 비종교인의 범죄 비율이 더 높다.
그나마 종교인이 범죄 수치를 낮춘 거다. 그럼에도 이 질문이 시사하는 바를 깊이
 수용할 필요가 있다. 종교인이 더 사회정화 기능을 하지 못하고, 더 성숙하게 살지
 못하고, 좀 이기주의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형식만 그리스도인이지,
내용은 안 바뀐 경우도 많았다. 빛과 소금 역할,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21. 로마敎皇의 決定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이
 가능한가?
- “교황의 무오류권(무류권)을 말한다. 가톨릭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무오류권은 교황좌에서 특별한 교리, 엄중한 진리의 문제에 관해 천명할 때 무오류권을 발동한다. 주로 기준이 애매할 때 이 기준을
 따르라고 천명하는 것이다. 아주 드물게 발동된다. 그러나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도 시간이 지나면 수정될 수 있다. ‘타 종교를 어떻게 볼 것인가’도 무오류권이 발동된
 사안인데, 결국 수정했다.”
22. 神父는 어떤 사람인가? 왜 獨身인가?
修女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 “신부는 예수님을 대리해 양떼를 돌보는 사람이다. 1965년(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만 양떼였다. 65년 이후에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양떼다. 수도원 소속인 수녀와 수사는 다 수도사다. 그들은 자신을 전적으로 투신해 영혼의 갈무리를 하는 사람이다. 신부와 수녀의 독신은 ‘나는 여기에만 헌신합니다’라는
 원리이다. 기혼과 독신이 섞여 있다가 13세기부터 사제는 독신이 됐다. 수도사는 그
 이전부터 독신수도 생활을 했다.”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企業主를 착취자로, 勤勞者를 착취당하는 자로 斷定,
기업의 分裂과 파괴를 助長하는데 資本主義체제와 美德을 否認하는 것인가?
-“이 문제는 역사성 안에서 봐야 한다. 우리나라에 노동 착취가 있었던 건 사실이다. 전태일씨 등은 하루 15시간 이상 노동했으니까. 그런데 모든 기업주가 착취자라고
 하면 곤란하다.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어디나 있다. 좋은 기업인도 있고, 나쁜 기업인도 있다. 그건 개별적 사안이다. 교회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이미 실패했다. 다만 교회가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이나 폐해에 관심을 갖는 건 맞다. 거기에 약자와 소외된 자가 있기 때문이다.”
24. 地球의 終末은 오는가?
- “종말이 언제일까. 내가 죽는 날이 종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오메가 포인트
(종말의 시점)가 있을 거다. 지구의 수명이 다하는 날이 올 테니까. 성경에는 종말이
 있다고 돼 있다. 그런데 이 종말을 보는 시각이 좀 다르다. 파국만은 아니다.
구원을 위한 최종 추수의 시간으로도 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린다. 종말을 기대하는 사람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 신앙인의 특권은 종말을 희망사건으로 본다는 것이다.
종교는 결국 종말 너머를 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질문은 ‘마지막’에 관한 것이었다. 타계 한 달 전, 24개의 질문을 던진 이 회장에게 그 마지막은 어떤 풍경이었을까. 질문지는 우리에게 그걸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우리가 ‘마지막’이라 부르는 곳, 종교에선 ‘또 하나의 시작’이라고 부르는 곳. 어쩌면
 마지막과 시작이 하나일지 모르는 곳. 그곳을 묵상케 한다.
동시에 이 회장의 질문은 마지막을 향해 한발씩 나아가는 우리가 ‘오늘’을 어떻게
 살 건가 하는 치열한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병철 회장
- 삼성 창업주인 이 회장은 1910년 경남 의령에서 출생, 87년 타계했다. 호는 호암(湖巖). 유교적 가풍의 집안에서 성장했고, 일본 와세다대에서 공부했다.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일제시대에 민족자본을 형성했다. 여기에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이란 호암의 지향이 깔려 있다. 평소 호암은 “내가 뽑은 인재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 가장 아름답고 고맙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인재제일(人材第一)’과 ‘사업보국’은 삼성그룹의 경영철학이 됐다. 초대 전경련 회장을 역임했다.
호암은 타계 2년 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진단 직후에 호암은 일본인 저널리스트 야마자키 가쓰히코와 만나 ‘좋은 죽음’이란 주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호암은 “인간인 이상 생로병사를 피할 수는 없겠지요. 불치병이라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적어도 살아서 아등바등하는 흉한 꼴만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라고 답했다. 그걸 듣고서 야마자키는 “사는 순간까지 삶만을 생각하며,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구도자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서에 『우리가 잘사는 길』 『호암자전(湖巖自傳)』 등이 있고, 호암 평전으로 『크게 보고 멀리 보라』(야마자키 가쓰히코 지음)가 있다.
차동엽 신부
- 1958년생. 서울 관악산 기슭의 달동네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로
 연탄과 쌀을 배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난 때문에 공고에 진학했고,
서울대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졸업 후에 다시 가톨릭대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했다. 1991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세례명은 로베르토다.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수학하고,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천 가톨릭대 교수이며, 성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있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차
 신부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말하곤 했다. 연구소 후원 계좌로 ‘추기경’이란 직함 없이 ‘김수환’이란 이름만 적어서 100만원을 입금한 적도 있었다.
이 사실은 뒤늦게 확인됐다.
차 신부의 대표 저서는 『무지개 원리』다. 지금껏 150만 부가 팔린 천주교계 최대 베스트셀러다. 이 밖에 『바보 Zone』 『뿌리 깊은 희망』 『행복선언』 등이 있다.
20대부터 간염과 간경화를 앓고 있지만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 木 里